<훔친 개 훔친 아기>
한 받
의미를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나는 입을 벌려 호흡하며
어떤 노래를 불러야 했으리라.
밤이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밖이 아니라 안이었고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것이 분명해,
덥지도 않았다.
어느새 자갈들이 뒹구는 소리들로 온통 시끄러웠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밤하늘의 별 대신에
어둠속에서 사람들의 눈동자가 총총히 그 다음을 기다리는 듯 했다.
곧이어 붉은색 빛의 가는 선이 검은 자갈 바닥에 선명하게 그어지는 것을
나는 무대 뒤쪽 어둠 속 공간속에서 지켜보았다.
천천히 속으로 하나-둘-셋-넷-다섯,까지 세고 심호흡 하고 무대로 나아가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 제목은 ‘롱굿바이’다. 내가 노래와 음악으로 참여한 이 공연의 제목은
‘훔친 개 훔친 아기’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상당히 이끌렸다.
제목만으로도 숨 막히며 아무것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연출자와 배우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 거 같았다.
올 초에 내 인스타로 연출자인 신후씨가 연락을 해 와서 그가 보내준 영상을 먼저 접했다.
보니 개가 나왔다. 개로 분한 예술가는 보이지 않았다. 영상 속엔 그저 개가 있었다.
나는 개가 된 적이 있기에 안다.
그렇다고 내가 개같이 살았으니까 공감이 되었다거나 개처럼 살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내가 들어가서 사는 집은 개집이 아니다.
나는 그저 무대에서 개가 되어 관객석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그건 정말 별스러운 체험이니까.
나는 예술가다. 개가 될 수도 있는.
하루는 서울무용센터에서 연습할 적에 방문해서 현장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덕분에 나의 늙음-세대차-을 재확인하는 수확(?)도 얻었다.)
그 다음 번 연습에 갈 때에는 음악들을 어느 정도 준비해 보았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정신없는 1년의 기간 동안 매일 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텍스트로 하여 음악들을 만들어 왔었다.
그때 만들어 놓은 약 230여곡의 음악들 중에서 공연과 어울릴 만한 것들로 간추려 보았다.
곡들을 신후씨에게 들려주며 반응을 살폈다. 현장 분위기에 맞춰 음악들을 틀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공연과 어울리는 음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연출자 신후씨의 선곡이 컸다.
롱굿바이가 공연 말미에 울려퍼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 외에도 다른 두 곡의 음악을 공연에 사용하게 되었다. 내 육신이 현장에 와 있어서, 살아 있어서, 내 육성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구나.
나 또한 연출자로 많은 이들과 작업을 해 왔고 해 봤다. 최근에는 작업이 별로 없지만 코로나 직전까지 다원예술 장르의 지원사업을 통해 지원받는 작업들을 많이 했다. 공연을 준비하며 연습하던 시간들을 팽팽하게 채우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참으로 진지하였고 유쾌하였고 아름다웠다.
그곳은 서로를 개개인 주체로 존중해 주는 그런 곳이었다.
특별히 신후씨의 연출하는 모습과 장면들을 보면서 현대의 영화작가 같다고 생각했다.
현대 영화는 이런 현장에서 새롭게 발명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밤이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우리에겐 노래가 있었고
우리에겐 우리가 있었기에
이게 내가 요즘도 꾸고 있는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어느 공연에 대한 기억이다.